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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모 공기업 담당자에게 연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안건들이 많아 번역 비중이 상당히 큰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가 번역 외주를 맡겼는데, 결과물을 보니까 아무리 봐도 이상해요. 번역물 보시고 체크 좀 해주시겠어요?”

담당자의 요청을 받고 번역물을 받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검토하는 동안 저의 황당하기 그지없는 기분을 맛보고야 말았습니다. 번역기를 돌렸나 싶을 정도로 오역이 많았고, 자료 조사가 소홀하여 번역하신 분의 인성마저 의심되는 번역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샘플로 번역물 첨삭 파일과 감수 내용의 일부를 간략하게 작성하여 담당자에게 보냈습니다.

 

<당시 담당자에게 보내기 위해 정리했던 내용>

원문을 읽어보니 문학적 느낌의 문체가 많아 번역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종류였습니다. 또 우리나라 지역을 소개하는 고유명사가 다수 등장하여 높은 번역 수준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전문 번역가라 하더라도 철저한 고증과 자료 조사 후에 번역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이력서도 꼼꼼히 보지 않고 일본에서 몇 년 살다 왔다는 분에게 번역을 맡겨버리다니.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그 결과 엉터리 번역물이 나와버렸습니다. 번역이 업무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도 불구하고 부서에 전문 번역 인력이 없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번역 외주를 넘겨 활용하지 못할 결과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공기업이었는데 말입니다.

이미 계약을 체결했고 번역을 엉터리로 한 분에게 번역료를 지급한 상태라 어쩔 도리가 없다고 담당자가 한숨을 쉬었습니다. 처음 번역하신 ‘양심 없는’ 분께서는 번역물에 문제가 없다며 초지일관 뻔뻔한 태도를 일관했습니다. 처음에 제가 의심했던 번역가의 인성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작업은 진행해야 했기에 담당자에게 이 번역물은 감수가 아니라 재번역이라고 말씀드렸고 결국 재번역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고객사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가로 번역료와 시간을 두 배나 들이게 되어버렸습니다.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내용이 많았지만, 검토 중 너무 인상 깊어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로 ‘録音が茂る’(!) 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일본어를 공부하셨거나 한자를 아시는 분이라면 알아차리셨을 수도 있지만, 번역문의 원문은 ‘녹음이 우거지는’이었습니다. 하지만 ‘録音が茂る’의 ‘録音’은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숲을 의미하는 ‘녹음(緑陰)’이 아니라 소리를 기록하는 ‘녹음(録音)’입니다.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소리를 기록하는 ‘녹음(recording)’이 계속 등장하자 번역하신 분이 번역기를 돌린 건가, 아니면 정말 일본에서 오래 살다 오셔서 ‘녹음이 우거지는’의 뜻을 모르셨나 하고 많은 고민을 했던 구절이었습니다. 이 문장이 그대로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되었다면, 그 숲은 푸른 잎이 우거진 숲이 아니라 소리를 녹음하는 전설의 숲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검수를 진행하며 전문 번역가와 그렇지 않은 번역가의 차이를 크게 느낄 수 있었는데, 철저한 자료 조사와 내용의 검증, 그리고 번역물을 대하는 번역가의 자세였습니다. 물론 번역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외국어와 모국어의 실력입니다. 하지만 이는 기본 중 기본이며 언어 능력도 중요하지만 철저한 자료 조사와 꼼꼼한 검수 작업에서 번역물의 품질이 좌우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었는지는 결과물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아마 전문 번역가가 번역한다면 ‘구상나무’가 ‘생각하는 나무(構想の木)’가 된다거나 ‘솔잎’이 ‘브러시(brush) 잎(ブラシの葉)’이 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지 않겠지요. 먼저 ‘구상나무’의 학명을 찾아보고 식물 관련 자료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토종 수목이라는 점을 알아낸 뒤 외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적절한 단어를 찾아 번역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처음부터 전문 번역가에게 번역을 맡기지 않아 고객사는 시간은 시간대로 비용은 비용대로 추가되는 손해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최초 번역가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일을 맡기지 않은 바람에 일을 두 번하게 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내용이라 번역이 잘못되면 망신을 당하고 공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간과 비용이 배로 들고 가장 중요한 기업 이미지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번역 비용을 아끼고자 검증 안 된 번역가에게 일을 맡기고 계시나요? 최근 번역청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번역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번역은 언어의 일대일 치환 작업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도, 문화, 분위기를 타 언어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번역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전문 번역가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번역 작업을 진행하면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일통번역사 이지혜>
-제주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졸업
-국내 대기업, 일본계 기업 전담 통번역사 근무
-현재 프리랜서 활동 중

 

Post Author: BabelTop